2015년 2월 24일 화요일

불황의 경제학

왜 크루그먼의 책을 이제서야 읽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자책감과, 이제라도 읽기 시작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 중에 어느 것이 더 큰지 잘 모르겠다. 내가 책을 읽으며 따로 북마크를 하지 않는 경우는 둘 중 하나. 1)북마크를 할 만한 문장이 단 하나도 없어서, 2)책 전체를 나중에 다시 읽고 싶을 만큼 내용이 알차서, 인데 크루그먼의 책은 후자에 해당했다. 흔히들 어빙피셔의 실패와 케인즈 파산 경험을 예로 들며 경제학 역량과 투자는 상관관계가 없음을 역설하지만, 글쎄, 크루그먼이 투자를 했더라면 적어도 최근 10년 정도의 성과는 훌륭하지 않았을까.

크루그먼에 따르면 국가경제의 신뢰도 차이에 따라 환율 절하 시의 결과가 엇갈리게 된다. 아시아 금융위기 시절 투자자들은 호주달러의 절하를 건실한 경제를 가진 호주에 투자할 좋은 기회로 여겼다. 그에 대한 결과로 호주달러의 하락은 자기제한적인 모습을 보였고, 실제로 호주는 아시아 위기 중에도 호황을 누렸다. 즉, 호주라는 국가의 경제에 대한 신뢰가 실제적인 이득으로 연결된 셈. 반면 지난 20년간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의 루피화 가치 하락은 Crisis를 떠올리게 했고, 자본유출이 발생해 실제로 Crisis가 나타났다. 경제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국가들의 환율 절하는 호황의 기회가 되었지만, 신뢰도가 낮은 국가들의 환율 절하는 자본유출을 야기했다는 것. 신뢰도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국가경제의 신뢰도는 어느 수준일까? 한국은 선진국인가, 아니면 여전히 이머징 마켓인가? 몇 가지 지표와 가격의 움직임들로 미루어 볼 때, 한국은 여전히 이머징 마켓에 속해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작년에 이머징 국가들의 통화절하율과 CDS상승률을 GDP로 가중평균해 추이를 살펴본 적이 있는데, 대체로 코스피의 움직임과 역행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해, 이머징에서 돈이 빠지고 CDS가 상승하면 코스피도 하락세를 보인다. 또 하나의 자료적 근거는 SK증권 이은택 연구원님의 2015년 전망 보고서에서 찾을 수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주식시장의 PER은 이머징 마켓의 PER에 동행한다.

사실 한국이 이머징에 속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굳이 위와 같은 자료를 제시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김태희가 미녀라는 것에 증명이 필요한가?), 여튼 결론은 그렇다. 한국은 여전히 이머징이다. 그리고 이것이 금리인하를 반대하는 진영의 주된 논거 중 하나일 것이다. 미국이 곧 금리를 인상할텐데, 한국이 금리인하를 하면 통화가치가 하락하고 자본이 유출되어 제2의 IMF가 찾아온다는 것. 이머징에 속한 한국의 금리가 미국보다 낮아진다면 돈이 몽땅 빠져나간다는 것.

그러나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외금리차가 좁혀진다는 사실 자체가 자본 유출을 유발할까? 아래는 국제수지 금융계정과 한-미 3년물 금리차를 함께 그려본 차트.

2012년부터 최근까지의 추이만 놓고 보면, 내외금리차의 축소가 자본유출을 유발했다는 주장이 타당해 보일 수도 있다. 한-미 3년물 금리차가 300bp에서 100bp까지 축소되는 동안, 월간 금융계정 순유출 규모는 월 30억불에서 80억불 수준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시계를 확장해 놓고 보면 내외금리차와 금융계정 순유출의 상관관계가 매우 낮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양국의 금리가 역전되기까지 했던 2005~2006년에도 금융계정 순유출 규모는 전혀 확대되지 않았다.

즉, 한국이 이머징급의 신뢰도를 가진 것은 맞다. 따라서 한국에서 위기의 시그널이 포착되면 자본 유출은 대단히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내외금리차가 좁혀지거나 혹은 역전되는 것이 위기의 시그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미국보다 한국의 금리가 낮다는 것을 이유로 한국에서 돈을 빼려는 유인이 클까, 아니면 한국이 미국을 따라 금리를 인상해서 가계 이자부담이 폭발하고 기업경기가 엉망이되었을 때 한국에서 돈을 빼려는 유인이 클까? 후자가 더 클 것이다.

다시 환율로 돌아와서, 그럼 달러/원 환율은 어떻게 될까? 주변국의 완화 기조에 이끌려 마지못해 금리 인하를 단행하게 되면 원화는 절하되겠지만, 이미 환시는 그런 기대감을 반영 중이기에 폭이 급격하지는 않을 것이고, 경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선에서 절하는 멈출 것이다. 내외금리차를 인식해 미국을 따라 금리를 인상하면? 경기는 엉망이되면서 Crisis를 떠올리게 할 정도의 급격한 원화 절하가 진행되고, 한국은 침체에 빠질 것이다. (쓰다보니 원화 숏은 참 매력적이란 생각이 든다. 기술적으로도 1,120원 안착 시 추가 약세를 기대해 볼 만한 상황.)

결국 현재 일각의 우려와는 정 반대로 한국의 신뢰도는 오히려 금리 인하를 통해서 얻어질 수 있다. 돈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른다는 격언을, 돈은 국채금리가 낮은 나라에서 국채금리가 높은 나라로 흐른다고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돈은 밸류가 낮은 곳에서 밸류 높은 곳으로 흐를 뿐이다. 문제는 한국이 불황의 경제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국가인지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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